부동산정보투자연구소

전원생활의 필수교육

오 즈 2020. 8. 13. 09:36

그냥 소박하게~ 젊은 느낌도 나고 이렇게 살고 싶다

 

전원생활의 필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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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METAPHORA 철골조 시공 전문교육과정 (완료)

대중교통 이용 찾아오시는길이번 제2기 교육 접수 완료하였습니다. 이번에 접수하지 못하신분들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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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번 교육을 받고 내가 살 집을 스스로 지을꺼다 ㅎ

 

 

언어는 존재의 집, 세계의 그림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다(하이데거). 뜻이 가득 담긴 말을 제대로 엮어내기만 하면, 그때 말은 그냥 말에 그치지 않는다. 언어는 집처럼 단단하고 산뜻하게 세워져 사실과 세계를 거뜬하고 넉넉하게 담아낼 수 있으며, 존재는 언어라는 집 속에다 자신을 깃들게 한다. 그래서 어떤 말을 듣거나, 그 말이 굳어져 놓인 글을 읽는다는 것은, 언어라는 집을 보며, 그 속에 들어가 깃든 존재의 모습을 만나 보는 것을 뜻한다. 아무 것도 담아낼 수 없는 말, 존재의 집이 아닌 비어있는 말, 그것은 정말 말이 아니란 말이다.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라는 말도 있다(비트겐슈타인). 말은 각 낱말들이 세계의 조각들을 가리키고, 모든 낱말들의 묶임이 존재의 조각들이 이루어내는 모자이크와 맞대응함으로써 세계를 그려낸다. “아침 햇살 눈부신데, 할머니 한분이 손수레를 밀며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여러분은 이 글을 읽으면서, 낱말이 나타나는 순서를 따라 그림을 그려나갈 것이다. 아침 풍경을, 맑고 푸른 하늘에 빛나는 태양을, 그 산뜻한 풍경 속에 느닷없어 보이는 늙은 여인 한분을, 그 분이 힘을 모아 수레를 미는 모습을, 그 분 앞에 하필이면 언덕길이 안타깝게 드러누워 있음을, 그 분이 수레를 밀며 조금씩 천천히 올라가는 힘겨운 모습을. 그렇게 언어는 하나의 그림과 같이 작동한다. 말과 글은 마주대한 현장을 그려내며, 그 현장을 떠나서도 그 말과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 속에 최초의 현장을 새롭게 떠오르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가 그림이며 집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정말 기발한 은유다. 존재의 집이란 존재를 담아내되, 존재의 크기와 모양을 따라 꼭 맞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세계의 그림이란 세계를 그려내되, 거울이나 사진처럼 고스란히 비추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포도를 정말 포도처럼 그린 그림만이 그림은 아닌 것처럼. 역동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순간의 색채를 길어내어 형태를 압도하였던 세잔이나 모네, 마네가 포도를 그려내도, 그 그림은 손색없는 포도 그림이 될 것이다. 색채를 존중하기보다는 다양한 각도 속에 포착되는 서로 다른 형태들을 하나의 평면 속에 켜켜이 담아내는 데 힘을 쏟았던 브라크나 피카소는 포도를 어떻게 그려낼까? 일상적 형태와 색조를 완전히 걸러내고 추상시켜 재구성하는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는? 몽상적이며 환각적인 현상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현실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묻는 달리나 마그리트는? 그들은 세계를 그렸으나, 새롭게 그려내었다. 그들이 그려낸 세계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그 어떤 시각에서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닮아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세계를 보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에서 벗어나 있는 세계의 측면을 그려내었다. 세계와 닮아있으면서도 벗어나는 그림, 언어가 딱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다.

▲탁월하게 말하기 위한 조건

언어가 존재의 집이며, 세계의 그림으로서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이라는 실증(實證)을 거쳐야 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두 사람 사이에서 사용되었던 언어는 사실을 제대로 담아내고 그려내는 유효한 것으로 증명되기에 실정법 같은 셈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을 이루어내는 실정법적인 힘을 언어는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말하기(lexis)의 탁월성(aret●)은 명확함에 있다고 정의해두자. 말(logos)이란 분명하지 않다면 제자신의 할 일(ergon)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III, 2, 1404b1-3) 언어란 의사소통이라는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명확해야 한다. 일단 말이 무슨 뜻인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오해의 소지 없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림으로 말한다면 또렷하게 대상을 그려주는 사진 같은 그림, 사실주의 기법에 충실한 그림이라 하겠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인다면, 무슨 의사소통이고 나발이고 있겠는가?

그런데 말의 명확성은 의사소통을 위한 ‘생’기초일 뿐이다. 일단 명확해야 말이 서로 통하겠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란 단순히 사실의 전달과 확인만을 겨냥하진 않기 때문이다. 복잡한 상황을 이루는 난해한 요소들이 얽힌 가운데 드러나지 않은 위기를 의식할 수 있도록 설득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사소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큰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깨닫게 하여 감동시킬 필요도 있다.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반감을 해소하고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관심을 끌고 호감을 갖도록 하는 고도의 언어전략을 짜야 할 때도 있다. 권태와 안일함에 빠져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기도 한다. 다양한 언어소통의 구조 속에서 명확성은 언어가 꼭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언어소통의 성공을 담보하는 충분한 조건은 아니란 말이다.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만약 사람들을 설득하여 내 의견에 다른 사람들이 뜻을 같이 할 수 있도록 하려면, 말은 “진부하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허풍이 되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적절해야 한다.”(1404b3-4) 의사소통 상황과의 적절성, 여기에 시학적인 원리가 들어간다면(‘시학’ 22, 1458a18-b18), 일상적인 어법에서 벗어나 진부함을 버리는 참신성에 새로운 강조점이 찍힌다. 명확한 의미를 바탕으로 상황에 적절하게 참신한 표현이 덧입혀진 말, 그것이 다양한 구조의 의사소통을 탁월하게 성공적으로 이루어나가는 힘이 된다는 말이겠다.

▲메타포라(metaphora)의 신비한 마력

이 힘을 확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메타포라라고 말한다. “메타포라는 무엇보다도 더 많은 명확성과 즐거움과 참신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어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수사학’ III, 2, 1405a8-10) 그래서 “메타포라에 능한 것이 무엇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취할 수가 없으며, 타고난 재능이 좋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실 메타포라를 잘 한다는 것은 두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to homoion)을 통찰할 수 있다(theorein)는 것이다.”(‘시학’ 22, 1459a5-8) 우리는 메타포라를 ‘은유(隱喩)’라고 번역하여 쓰고 있는데, 이 말은 어떤 낱말이나 낱말의 뭉텅이를 고유하게 사용되던 곳에서 빼내어 다른 곳으로 자리를 ‘바꿔(meta)’ 은근슬쩍 ‘옮겨 놓는(phora)’ 것을 뜻한다.(21, 1457a6-b33) (사실 은유라는 번역어는 메타포라보다 좁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메타포라에는 직유나 환유, 제유 등의 비유법 일반이 다 포괄될 수 있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한쪽에 ‘하루가 저물어가는 황혼’이 있고, 다른 쪽에 ‘인생이 끝나가는 노년’이 있다 하자. 둘 사이에는 닮은 구석이 있다. 이 유사성을 포착한 사람이라면, 하루에서 황혼을 떼어 내어 인생의 노년 쪽으로 가져가, ‘노년’의 자리에다 ‘황혼’을 넣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황혼’이라 할 것이다. 두 항 사이의 닮은 구석을 이용한 ‘말의 바꿔치기(metaphora)’인 메타포라는 인생이 끝나가려 하며 오늘 내일 하는 노년의 남루함과 비참함을 하루가 저무는 황혼의 풍경으로 바꿔줌으로써, 노년을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하프의 선율을 따라 금빛 가루를 뿌리는 마술봉의 마력처럼, 언어의 메타포라는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는 희망과 여유를 불러일으킨다.

존재의 집인 언어에 적절한 장식과 색채를 옮겨와 입혀주고, 깃들어있는 존재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 힘, 세계의 그림인 언어에 새로운 시선과 시각과 관점을 주고, 새로운 색채와 형태를 옷 입히며, 자유로운 상상의 전이(轉移)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하는 힘, 그것이 바로 메타포라의 신비한 마력이다. 이는 언어의 명확성과 동시에 참신성을 보증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메타포라는 단순히 “내 마음은 호수, 그대 노 저어”라는 정도의 낱말이나 개념의 옮겨 바꾸기 수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대통령 선거와 말달리기 시합과 같은 상황 대 상황의 대규모 바꿔치기라는 알레고리아(allegoria) 수준까지도 포괄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의 특정한 사건을 상상의 공간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인간과 삶, 사회와 역사의 본질을 새롭게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는 예술적 창작의 모든 행위까지도 메타포라에 포섭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폭의 그림, 한 컷의 사진, 한 편의 시, 비극과 소설, 영화 등은 그 자체가 삶과 인간, 세계와 존재를 상상의 공간 속에 새롭게 그려내고 담아내는 치밀하게 계산된 메타포라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메타포라는 단순한 표현법의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신비로운 힘, 나아가 사유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전이 일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예술 창작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8311511001&code=900308#csidxb27b870bbdcbc3abce90b9342bf81e5